주간시흥신문 기사입력  2008/09/17 [21:26]
"베풀면서 행복을 느끼며 살아 왔다"
작지만 카리스마 넘치는 현실적인 리더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네이버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    전 시흥시생활체육협의회 최동정 회장
“사회에서 꽃이 되고 잎이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정한수를 떠놓고 어린 손자가 모든 사람이 지켜볼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해 주시던 할머니를 미산동에 모셔놓고 할머니의 자랑스런 손자가 되기 위해 시흥에 터전을 잡은 최동정 전 시흥시생활체육협의회장(현 동림관 대표)은 일인자가 되어야 한다는 강한 신념으로 매사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오고 있다. 
 
◈ 부유한 어린 시절에 이미 성공 가능성 보여
 
어릴 적 가정형편이 넉넉하여 닭고기와 계란이 끊이지 않고 먹었던 최동정 회장은 지금도 닭고기와 계란을 크게 좋아 하지 않는다. 경북 구미가 고향인 최동정 회장은 부친이 6·25때 전사하셔서 일찍 부친을 잃었으나 몸종을 2명이나 두고 살 만큼 매우 부유한 집 외아들로 태어났다. 남다른 호강 속에 어린시절을 보낸 최 회장은 어머니와 할머니 밑에서 누이와 함께 부족한 것 없이 살아왔으며 하고 싶은 것은 떼를 쓰면 안 되는 것이 없던 어린시절 모친을 지나치게 귀찮게 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어린시절에 이미 최 회장의 다양한 능력이 인정됐는데 체구는 작지만 초등학교 6년 동안 반장을 놓지 않을 만큼 총명함이 인정되어 주위사람으로부터 ‘최 총기’란 별명을 달고 다녔다. 자신이 모친을 지나치게 귀찮게 하여 일찍 세상을 뜨신 것으로 믿고 있는 최 회장은 중1때 모친이 세상을 뜨면서 생활환경이 완전히 바꿔지게 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맡게 됐다.

할머니의 극진한 보호 속에 살던 최 회장은 누이와 함께 숙부가 계신 서울로 상경해 광신상고에 진학하게 됐으나 숙부의 무관심 속에 생활의 어려움을 시작 됐다. 모친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가족이 모두 잠든 야밤에 찬물 한 그릇 올려놓고 모친의 제사를 지냈던 기억들은 최 회장의 인생에 가장 가슴 아픈 일 중 하나로 가슴깊이 남아있다.

한양대학교 경영학과에 진학한 최 회장은 대학 3년 때 “동정이가 사회에서 모두가 볼 수 있는 꽃이 되고 잎이 되게 해주십시오.”라며 장독대에 정한 수를 떠놓고 빌며 극진한 애정을 보이셨던 할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시자 할머니를 미산동 언덕에 모시게 됐다. 누님의 가출로 구로 공단에 혼자 하숙을 하면서 모든 것을 내가해야 됐으며 이때부터 혼자 사는 법을 배우며 강한청년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76년 벽산그룹 무역부에 취업 벽산그룹 산하 한창전자에서 국내 최초로 개발한 UL인증 전선의 수출통관 업무를 맡으면서 그의 잠재된 능력이 발휘되기 시작했다. 탁월한 업무 능력을 인정받고 빠른 승진과 함께 벽산그룹의 주요 인물이 되기 시작했고 최 회장은 회사의 배려에 만족스런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벽산그룹에서 중매로 만난 지금의 부인과 결혼을 하게 됐으며, 그후 자신의 사업시작을 결심하게 됐는데 이때 회사의 완강한 만류를 뿌리치고 동림전자를 창업했으며 전선 판매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청계천 한 구석에 매장을 내고 벽산에서 생산 되는 전선을 국내 시판하는 일을 시작으로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전선연결 커넥터와 하우징을 개발했으며 자신이 개발한 제품을 수입가격의 절반이하로 판매하면서 사업은 성장하기 시작됐다.

처음 시작할 때 회사 운영이 어려워 점심시간에 직원들을 식당으로 보내고 직원 몰래 혼자 라면을 끓여 먹던 일들이며, 지방 배송비를 절약하기위해 물건의 뭉치수를 줄여가며 힘들게 운반하던 시절이며, 아이들의 생일상을 제대로 마련해 주지 못해 가슴 아팠던 일들은 더욱 최 회장을 더욱 강인하게 만든 추억으로 기억하고 있다. 
 
◈ 할머니를 곁에 두고 싶어 시흥과의 관계 시작
 
최 회장은 부모에게 밭은 재산은 하나도 팔지를 않았으며 지금도 매입한 것은 절대 팔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살아오고 있다. 할머니를 가까이 두고 자주 뵙고 싶어 사업이 번창하며 벌어들인 돈으로 시흥에 조그만 땅이라도 구입 했으면 할 때 마침 현재의 동림관 자리가 매물로 나와 구입하게 되는 행운이 찾아왔으며 이때부터 시흥과의 관계가 시작 됐다.

최 회장은 동림관을 할머니가 마련해 준 것이라고 강하게 믿고 있다. 동림관을 지을 때는 직접 나서 건축에 모든 것을 관여 했으며 모래 한 알도 아까웠으며 건축하는 동안은 매우 즐거웠다고 그때의 기억을 회고한다. 최동정 회장은 시흥시청 주변을 오가는 시간이 매우 행복하다. 혼자 지나칠 때는 꼭 미산동 언덕에 계시는 할머니께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면 할머니는 주면에 같이 잠든 친구들에게 ‘저 아이가 내 손자라오.’하고 자랑을 하고 계신다고 믿고 있다.

◈ 시흥시와의 또 다른 인연

‘만물이 나를 위해 있다.’라는 생각과 항상 베푸는데 쾌감을 느끼며 살아온 최 회장은 시흥에 자리 잡게 된 후 시흥시 여성의 전화를 시작으로 시흥에서의 사회활동이 시작됐으며 생활체육 임원으로 활동하면서 민선 최초 시흥시 생활체육 협의회장으로 취임하게 됐다.

‘사람은 51%만 내 마음에 차면된다.’라고 51%의 중요함을 강조하는 최 회장은 많은 단체장을 이끌어 가기위해서 지는 것을 먼저 배우고 모두의 주장에 이기려 하지 않았으나 결국에는 모든 것이 자기의 의견대로 진행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단체장은 욕심이 없어야 됩니다.”라고 말하는 최 회장을 보고 과연 생활 체육협의회를 잘 이끌어 오고 경기도에서 가장 앞서가는 단체로 만든 것에 대한 답을 알아낼 수 있게 한다. “밤에 별빛은 주변에서 다른 별들이 비춰주어 빛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겸손함과 작은 체구에 큰 배짱이 큰일을 할 수 있는 바탕이 갖춘 인물이란 것을 충분히 하게 된다.

1남 2녀를 두고 행복하게 살고 있는 최 회장은 7년 전 부인이 암 판정을 받으면서 또 한번의 정신적인 좌절을 맛보게 되었다. 이때는 주위에 여자가 옆에 오는 것도 싫었고 부인에 대한 미안함에 많은 고민을 하는 시간이었으며 그의 지극한 애정이 통했는지 지금은 많이 호전되어 거의 완치 됐으나 부인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이 항상 가슴속에 크게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

시흥시생활체육 회장을 이임하고 부터는 술을 마시고 귀가하는 시간이 빨라져 가족에게는 다행이며 이때부터 건강도 더욱 좋아 지는 것 같다고 말하는 최 회장은 현재 1%복지재단 부 이사장으로 시흥 지역에서 사회활동을 계속하고 있으며 시흥을 사랑하는 시흥인으로 많은 시민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사업에만 전념하고 있는 최동정 회장은 최근 시흥시의 혼란스런 상황에 매우 가슴아파하며 “시흥시가 안타깝다.”는 말을 되 뇌이고 있다.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네이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간시흥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최동정 관련기사목록
많이 본 뉴스
광고